피해자 증언

저는 일본 군대 성노예
끌려갔던 김학순입니다.

뉴스에 나오는걸 보고 단단히 결심했어요. 이제는 바로 잡아야 한다. 저렇게 거짓말을 하는데 왜 거짓말을 하는지 모르겠단 말이야, 그래서 결국엔 나오게 됐어요.

누가 나오라고 말한 것도 아니고 내 스스로 칠십이 다 됐으니 이젠 죽어도 괜찮아. 근데 나올 땐 조금 무서웠어요. 죽어도 한이 없어요. 이젠 하고 싶은 말은 꼭 하고야 말거니까. 언제든지 하고야 말거니까. 내 팔을 끌고 이리 따라오고라고 그때 그 사람에게...

생존자 35명 日本軍性奴隸

우린 지금 현재도 시간이 갈 수록 그 고통을 이야기할 증언들의 소중한 시간들을 잃어버리고 있습니다.

그 사무친 고통과 치욕의 시간을 풀어낼 길도 여전히 부족합니다.
결코 잊어서도 않되고 잊혀져서도 안되는 역사를 그들이 말하는 해결로 절대 받아 들일 수 없습니다.

길원옥 할머니(1928년 평안북도 희천 출생)

"바람부는 대로 물결치는 대로 넘어갔어요. 세월이" 그걸 다 기억하고 살았으면 아마 살지 못했을 것이다. 어떤 때는 나이가 먹어서 그러는지 모르겠지만 하루 종일, 아침 먹고 자고, 점심 먹고 자고, 저녁 먹고 자서 밤에 잠이 안 온다. 되짚어 보려고...

공점엽 할머니(1920년 출생 ~ 2016.05.17 별세)

내가 그런 일 저런 일 생각하면 눈앞에 선명하게 떠올라서 잠이 안 온다. 내가 어떻게 그런 데서 살아나왔는지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어디로 간다고 하면서 날마다 낮이고 밤이고 차만 타고 갔는데 어딘지는 몰라도 겁나게 먼 데를 가는 것인데...

김복동 할머니(1926년 경남 양산 출생)

열다섯 살에 집을 떠났다가 스무 살이 되는 해에 돌아왔으니, 5년만인 것이다. 다음날 어머니와 나는 양산으로 떠났다. 형부는 내가 성노예 생활을 한 것을 안 것 같았지만 어머니에게 말하지 않았다. 병원에서 간호부생활을 했다고만 했다.

황금주 할머니(1922년 충청남도 부여 출생 ~ 2013년 별세)

담요 한 장과 누비이불 한 장씩이 지급되었다. 우리들은 추워서 서로 끌어안고 잤다. 나는 ‘이 안에서 군인들의 식사나 빨래를 해주나 보다’라고 생각했다. 그 고야에는 이미 와 있던 여자가 몇 명이 있었다. 그들은 우리들에게 “너희들도 이제 죽었구나. 불쌍하다”라고 말했다.

장점돌 할머니(1923년 충북 영동 출생 ~ 2011.03.06 별세)

나는 어떤 때 가만히 누워서 생각하면 벌떡 일어나게 된다. 가슴이 답답해져서 '하~'하고 숨을 한 번씩 쉬어야 된다. 그리고 천장을 들여다보고 아무 생각 안 하면, 이제 좀 가라앉아서 괜찮아진다. 또 머리에 무엇이 떠올라오면 '아이 나 죽겄다.'하고 나간다...

윤두리 할머니(1928년 부산 출생 ~ 2009.05.28 별세)

나는 1928년 3남 4녀 중 넷째로 태어났다. 오빠는 중학교를 졸업했으나, 나머지 형제 자매들은 국민학교를 졸업했거나 중퇴했다. 형제 가운데 나만 서울 서대문에 있는 천연보통학교에 다녔고, 다른 형제자매들은 부산에서 학교를 다녔다...

강덕경 할머니(1929년 출생 ~ 2009.05.28 별세)

나는 1929년 2월 경남 진주 수정동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일찍 돌아가시고 어머니는 재혼하여 나는 대부분의 유년시절을 외가에서 보냈다. 외가는 사는 형편이 괜찮았다. 수정동 가까이 봉래국민학교가 있었지만...

안점순 할머니(1928년 서울 마포 출생 ~ 2011.03.06 별세)

그때는 저놈들이 우리를 짐승처럼 대했지. 인간으로 취급 안 했어. 니기 가자마자 지랄들을 했지.

김학순 할머니(1924년 길림 출생 ~ 1997년 별세)

저녁 때 군인들이 올 때는 술을 먹고 와서 “노래를 해라, 춤을 춰라” 하면서 사람을 아주 성가시게 할 때가 많았다. 그러면 나는 뒤뜰에 숨곤 했다. 그러다 군인이 나를 찾아내면 더 거칠게 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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