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해자 증언

저는 일본 군대 성노예
끌려갔던 김학순입니다.

뉴스에 나오는 걸 보고 단단히 결심했어요. 이제는 바로 잡아야 한다. 저렇게 거짓말을 하는데 왜 거짓말을 하는지 모르겠단 말이야, 그래서 결국엔 나오게 됐어요.

누가 나오라고 말한 것도 아니고 나 스스로 칠십이 다 됐으니 이젠 죽어도 괜찮아. 근데 나올 땐 조금 무서웠어요. 죽어도 한이 없어요. 이젠 하고 싶은 말은 꼭 하고야 말 거니까. 언제든지 하고야 말 거니까. 내 팔을 끌고 이리 따라오고라고 그때 그 사람에게...

생존자 33명 日本軍性奴隸

우린 지금 현재도 시간이 갈수록 그 고통을 이야기할 증언들의 소중한 시간을 잃어버리고 있습니다.

그 사무친 고통과 치욕의 시간을 풀어낼 길도 여전히 부족합니다.
결코 잊어서도 않되고 잊혀져서도 안되는 역사를 그들이 말하는 해결로 절대 받아 들일 수 없습니다.

길원옥 할머니(1928년 평안북도 희천 출생)

"바람부는 대로 물결치는 대로 넘어갔어요. 세월이" 그걸 다 기억하고 살았으면 아마 살지 못했을 것이다. 어떤 때는 나이가 먹어서 그러는지 모르겠지만 하루 종일, 아침 먹고 자고, 점심 먹고 자고, 저녁 먹고 자서 밤에 잠이 안 온다. 되짚어 보려고...

공점엽 할머니(1920년 출생 ~ 2016.05.17 별세)

내가 그런 일 저런 일 생각하면 눈앞에 선명하게 떠올라서 잠이 안 온다. 내가 어떻게 그런 데서 살아나왔는지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어디로 간다고 하면서 날마다 낮이고 밤이고 차만 타고 갔는데 어딘지는 몰라도 겁나게 먼 데를 가는 것인데...

김복동 할머니(1926년 경남 양산 출생)

열다섯 살에 집을 떠났다가 스무 살이 되는 해에 돌아왔으니, 5년만인 것이다. 다음날 어머니와 나는 양산으로 떠났다. 형부는 내가 성노예 생활을 한 것을 안 것 같았지만 어머니에게 말하지 않았다. 병원에서 간호부생활을 했다고만 했다.

황금주 할머니(1922년 충청남도 부여 출생 ~ 2013년 별세)

담요 한 장과 누비이불 한 장씩이 지급되었다. 우리들은 추워서 서로 끌어안고 잤다. 나는 ‘이 안에서 군인들의 식사나 빨래를 해주나 보다’라고 생각했다. 그 고야에는 이미 와 있던 여자가 몇 명이 있었다. 그들은 우리들에게 “너희들도 이제 죽었구나. 불쌍하다”라고 말했다.

장점돌 할머니(1923년 충북 영동 출생 ~ 2011.03.06 별세)

나는 어떤 때 가만히 누워서 생각하면 벌떡 일어나게 된다. 가슴이 답답해져서 '하~'하고 숨을 한 번씩 쉬어야 된다. 그리고 천장을 들여다보고 아무 생각 안 하면, 이제 좀 가라앉아서 괜찮아진다. 또 머리에 무엇이 떠올라오면 '아이 나 죽겄다.'하고 나간다...

윤두리 할머니(1928년 부산 출생 ~ 2009.05.28 별세)

나는 1928년 3남 4녀 중 넷째로 태어났다. 오빠는 중학교를 졸업했으나, 나머지 형제 자매들은 국민학교를 졸업했거나 중퇴했다. 형제 가운데 나만 서울 서대문에 있는 천연보통학교에 다녔고, 다른 형제자매들은 부산에서 학교를 다녔다...

강덕경 할머니(1929년 출생 ~ 2009.05.28 별세)

나는 1929년 2월 경남 진주 수정동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일찍 돌아가시고 어머니는 재혼하여 나는 대부분의 유년시절을 외가에서 보냈다. 외가는 사는 형편이 괜찮았다. 수정동 가까이 봉래국민학교가 있었지만...

안점순 할머니(1928년 출생)

그때는 저놈들이 우리를 짐승처럼 대했지. 인간으로 취급 안 했어. 니기 가자마자 지랄들을 했지.

김학순 할머니(1924년 길림 출생 ~ 1997년 별세)

저녁 때 군인들이 올 때는 술을 먹고 와서 “노래를 해라, 춤을 춰라” 하면서 사람을 아주 성가시게 할 때가 많았다. 그러면 나는 뒤뜰에 숨곤 했다. 그러다 군인이 나를 찾아내면 더 거칠게 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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