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군 성노예제는?

일본군 성노예제, 일본군‘위안부’는?

1930년대부터 1945년 일본의 패전에 이르기까지 일본군은 제도적으로 ‘군위안소’를 설립하고 점령지와 식민지 여성들을 동원하여 성노예로 만들었다.

일본군‘위안부’는 범죄의 주최인 일본군을 명기하고 역사적인 용어로서의 위안부를 따옴표 안에 넣어 표기한 것이고, 일본군성노예제는 일본군의 제도적, 조직적 범죄임을 정확히 드러내기 위해 사용하는 단어이다. 영어로는 Military Sexual Slavery by Japan으로 표현하여 ‘성노예’라는 범죄의 본질을 드러낸다.

※ 종군위안부 : ‘종군’에는 군을 따라갔다는 뜻으로, 자발적이라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
※ 정신대 : 일본의 전시체제 돌입과 함께 조선의 노동력을 강제동원한 제도. 여성의 경우 여자(근로)정신대라는 이름으로 광범위하게 사용되었다.

일본군에게 강제로 잡혀와 성노예로 갖은 집단 강간울 당하며 시달리다 버마에서 발견된 임신한 한국인 여성 - 1944년 9월

황금주 할머니의 젊은 시절
할머니는 13세 되던 해인 1939년 연행되어 해방이 되기까지 만주 등지에서 일본군성노예로 고통받았다.

군용트럭으로 이동하는 일본군성노예 피해자들

강제동원

1932년 초 상해사변 때 일본군인들에 의한 강간사건이 빈번해지자 점령지역에서의 반일감정이 고조되었고 군인들이 성병이 감염되는 일이 발생하여 전쟁수행에 차질이 빚어지게 된다. 이에 따라 일본군은 조직적으로 ‘위안소’ 제도를 도입하고 식민지 및 침략지 여성들을 동원하였다. 한국 정부에 등록된 피해자들의 실태조사를 통해 확인된 바로는 연행 당시의 나이가 11세에서 27세에 이르며 대다수 취업사기나 유괴, 납치 등의 방식으로 동원되었다.

‘군위안소’ 종업부 등 모집에 관한 건 : 성노예 징집에 있어 일본육군성의 관여를 드러내는 문서

‘군위안소’ 종업부 등 모집에 관한 건 : 성노예징집에 있어 일본육군성의 관여를 드러내는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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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군 ‘위안소’ 분포도

‘위안소’에서의 생활, 해방 직후

‘위안소’의 규정

‘군위안소’는 설립, 운영, 성노예 모집에 있어 군이 직접 하거나 민간에 위임한 경우, 그밖에 시기와 장소 등에 따라 다양한 형태를 나타냈으나 어느 경우에나 군대의 보호와 감독, 엄격한 통제를 받았다.

‘위안소’에서 사용된 콘돔. ‘돌격1호’라 불리웠다

각 ‘위안소’의 규정에는 계급별 사용시간, 요금, 성병검진 및 기타 위생사항 등이 명기되어 있었으며, 많은 군인들이 몰려 20-30명이 문 밖에서 줄을 서서 기다렸다고 일본군인들이 증언하고 있다.

‘위안소’ 규정
군인 군속 외 입장금지 규정, 입장요금 등이 병참사령부 명의로 적혀 있다.

줄을 서서 기다리는 군인들

성노예들의 생활

일본군성노예제 피해자들은 일본 병사들의 안전을 위해 성병검진을 주기적으로 받아야 했으며, 월경이나 임신 때도, 질병에 걸리더라도 무자비하게 강간을 당했다고 증언한다. 여성들은 마음대로 ‘위안소’를 떠날 수 없었고 기본적인 이동이나 생활도 통제를 받아야 했다. 성노예들을 일컬어 “천황이 하사한 선물”, “위생적인 공중변소”라고 하는 기록도 찾아볼 수 있다.

종전 시 성노예들의 상황

일본의 패전과 함께 일본군 성노예들은 현지에 버려지거나 폭격 으로 사망, 혹은 일본군에 의해 살해 당하기도 했다. 생존자들은 고향으로 돌아오기 위해 다시 고난에 직면해야 했고, 일부는 차마 고향으로 돌아올 수 없어 귀국을 포기하기도 했다.

‘위안소’ 내부

성병검진대

전장에 버려진 성노예들 임신한 여성은 북한 피해자 박영심 할머니

해방 후,침묵을 깨뜨린 용기

해방 후 생존자들의 생활

일본군 성노예제 피해자들은 ‘위안소’에서 당한 구타나 고문 그리고 성폭력 등으로 인해 평생 치유하기 힘든 신체적 고통 속에 살아야했다. 아이를 낳을 수 없는 경우도 많았고 이로 인해 가정을 이루는 것도 힘들었다. 무엇보다 여러 심리적 후유증을 평생 안고, 주위의 시선과 편견에 맞닥뜨려 긴 세월을 침묵 속에 살아야만 했다.

위안소’에서의 폭력으로 어깨가 탈구된 김은례 할머니

북한 피해자 김철순 할머니의 팔에 새겨진 ‘위안소’ 경영자의 이름

울부짖는 일본군 성노예제 피해자 이옥선 할머니

해방 후,침묵을 깨뜨린 용기

침묵을 깨트린 용기

1988년 ‘여성과 관광문화 세미나’에서 윤정옥 교수에 의해 처음 으로 일본군 성노예제 문제가 세상에 드러난 후 많은 여성 단체들과 더불어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가 결성되어 일본 정부를 향해 문제제기를 시작하였다. 그러나 일본정부는 관여사실을 부인 했다. 이에 김학순 할머니가 최초로 기자 회견을 통해 자신이 바로 일본군 성노예제 피해자임을 공개적으로 증언했다.

1991년 8월 14일, 최초로 공개증언하는 김학순 할머니

이는 다른 피해자들이 세상으로 나올 수 있는 용기를 주었고 문제 해결을 향한 걸음에 있어서도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 이웃, 가족 과도 단절된 채 일본군 성노예제 피해 사실조차 제대로 이야기 할 수 없었던 생존자들은 많은 여성들, 시민들과 손잡으면서 적극적으로 일본정부의 범죄행위를 고발하기 시작했다.

1991년 9월 18일, 정신대신고전화 개통

1992년 1월 8일, 제1차 일본군 성노예제 문제해결을 위한 수요시위

문제해결을 위한 활동

연대와의 손잡음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의 주최로 매주 수요일 12시 주한 일본대사관 앞에서 열리고 있는 수요시위는 많은 여성들과 시민들 그리고 단체들이 함께 하여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으며, 2011년 12월 14일 1000차 수요시위를 맞이해 평화비(소녀상)가 세워 졌다. 일본군 성노예제 문제 해결을 위한 연대는 아시아를 넘어 각지로 확산 되어 갔다.
필리핀, 대만, 인도네시아, 중국, 동티모르, 네덜란드, 일본 그리고 남과 북은 아시아 연대회의와 연대집회, 2000년 여성 국제 법정, 각국에서의 결의안 채택, 글로벌 캠페인 등을 통해 공동의 노력을 기울여 나갔고 이러한 연대는 피해국을 넘어 미국, 유럽, 오세아니아 등 각국으로 퍼져 나가고 있다.

2011년 12월, 제1000차 수요시위에 세워진 평화비(소녀상)

1992년 8월, 제1차 아시아연대회의

2000년 일본군성노예전범 여성국제법정

당당히 선 할머니들

할머니들은 이제 더 이상 단순한 피해자에 머무르지 않고 스스로 일본정부를 향해 그리고 세상을 향해 명예와 인권 회복을 외치고 있다. 그리고 당당한 평화운동가로, 여성운동가로 거듭나 다시는 자신과 같은 일을 겪는 사람이 없어야 한다며 어느 곳이든 달려가 큰 소리로 외치고 있다.

2013년 5월18일 일본 순회증언집회

일본 순회 증언집회에는 김 할머니와 길원옥(86) 할머니가 참가하고 있다. 18일 오키나와 ‘할머니와 교류모임’에 참석한 성노예제 강제동원 피해 할머니들은 19일 오키나와현민대회에서 연설한 뒤 히로 시마로 옮겨 이날 밤 열린 모임에서 증언했다. 할머니들은 24일 하시모토 도루 대표와 만나 발언에 대한 사죄를 요구할 예정이다.

김복동 할머니가 18일 일본 오키나와 샬롬회관에서

2013년 9월, 유엔인권이사회 24차 회의에 참석한 김복동할머니

문제해결을 위한 활동

일본군 성노예제 피해자에게 명예와 인권을!

그러나 할머니들은 문제해결을 보지 못한 채 한 분씩 한 분씩 우리 곁을 떠나고 있다. 할머니들이 한 분이라도 더 살아 계실 때 문제해결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다양한 노력이 계속되고 있지만 더 많은 사람들의 연대가 필요하다.

“속에 파묻은 거를 말할라믄

내 가슴도 터져요.” -강일출

“내가 살아남은 게 꿈같애.

꿈이라도 너무 험한

악몽이라"- 정서운

“느그들이 와서 보상하고

우리한테 와 빌어라.” - 장점돌

“한 마디라도 사과의 말을,

진실한 사과의 말을 하는 게

소원이죠.” - 길원옥

“잊어버리면 절대 안 된다.”

- 임정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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